김흥숙
Artist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석사) 졸업
* 개인전
2023 <경계를 넘나드는> 롯데백화점 일산점
2022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 일지미술관
2022 <경계에서> 남송미술관
2022 <경계를 넘나드는> 유나이티드 갤러리, 서울
2021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 흥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20 <산의 울림> 군포문화예술회관, 경기
2019 <산의 울림> 평촌아트홀, 경기
2018<새들의 속삭임> 군포문화예술회관, 경기
2017 새들과의 대화> 갤러리 도솔, 경기
2017 <새들과의 이야기> 수목원갤러리, 경기
2016 <새들과의 대화> 경인미술관, 서울
그 외 20여회
* 아트페어
2022 Kiaf Art Seoul 2022, 서울 코엑스
2022 프랑스, 싱가폴 아트페어
2021 Kiaf Art Seoul 2021, 서울 코엑스
2019 Seoul Art Show 2019, 서울 코엑스
2018 Korea Art Festival Art Fair 2018. 서울 킨텍스
2015 마니프 아트페어 2015, 서울 예술의 전당
그 외 10여회
*단체전
2022 아트메트로 정기전, 인사아트프라자
2021 Korea Art 우수작가 300인전, 경기 평촌아트홀
2021 그리움이 있는 풍경전, 경기 평촌아트홀
2021 예형회 회원전, 서울 라메르 갤러리
2021 안양미술협회 회원전, 경기 평촌아트홀
그 외 200여회
*수상경력
나혜석미술대전,
경기미술대전,
관악현대미술대전,
목우회 및 50여회 장려상, 특선
*소속
한국미술협회, 안양미협, 예형회, 수리작가회,
그리움이 있는 풍경, 아트 메트로 회원
작가노트
경계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영혼과 육체
당신과 나
어떤 바라봄일까?
경계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경계가 아닐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막 사라지려 하는 그것, 혼성의 공간에서 겹쳐지고 분절된다. 온갖 차원으로 이루어진 허수의 공간이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며,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공간이다.
경계는 틈에 의해 확장된다. 틈에서 발생하는 기운으로 인해 역동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공간은 기운과 기운들이 소용돌이치는 생명의 순환 공간, 파장과 파동의 공유하는 공간으로 물감과 물감 사이의 틈, 붓과 캔버스의 공간이다.
나에게 있어 ‘본다는 것’에 대한 사색은 무한대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눈’하나를 더 지닌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형상화함으로써 하나의 ‘눈’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캔버스가 가지고 있는 2차원에 하나의 차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것을 형식화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림이다.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창조되는 것 같지 않고, 제 스스로 형성되어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찾아가는 것이다.
캔버스의 색은 면이 되고, 선이 될 때 생성되는 이미지는 서로 교차되며 혼합된다. 아크릴 물감이 갖고 있는 물성을 이용하여 그려지고, 섞이는 과정을 몇 차례 반복 후에 모티브를 잡는 과정은 파동의 주파수를 용해시키는 과정이다.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은 물감을 이용하여 겹겹이 쌓아 올리고, 다시 한 면을 자르기도 한다. 닦아내고 칠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색들은 서로 엉키면서 형체를 감춘다.
이때 사물의 어두운 부분에 빛을 비추면, 빛은 분해되어 파장으로 색채로 드러나고, 빛으로 인해 사물의 윤곽이 보이며 그 실제를 인식하게 된다. 이때 미묘한 색상의 차이들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채도를 조절하므로 색은 확장되어 간다. 그리고 빛의 파동에 의해 확장된 색은 상상력과 결합하여 산의 윤곽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묘한 여백의 공간이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동의 생동감으로 인해 생명은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거듭할 수 있다.
이러한 생동감을 산의 울림, 즉 기(氣)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기란 생명의 근원으로 우주공간에 가득 찬 에너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허공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가 가득하고, 파장과 파동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본인은 전통 산수화에 주목하였다. 우리에게 있어 자연이란 매우 소중하고 절대적 이었으며 인간처럼 살아 숨 쉬고 있는 생동하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기운생동(氣韻生動)하는 ‘산(山)과 수(水)’를 그렸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우리가 지니는 감성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바탕으로 현실과 이상 세계를 넘나드는 초월적 세계관에 대해 주목하였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캔버스 위에 색을 칠하는 행위는 시각적인 나열이 아니라, 그 색의 역동적이고 파토스적인 역량을 선택하는 작업이다. 면과 면의 접합을 통하여 선과 선이 만나고, 이 면과 선이 다가와 손끝에서 부딪힐 때, 캔버스와 자신만의 심미적 표현으로 형태를 찾아간다.
하얀 캔버스의 화면은 설레임의 시작이다. 물감과 캔버스는 손의 촉감이 먼저 자극한다. 캔버스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 내리고, 잠시 생각에 잠기곤 한다. 어떤 이미지와 물감이 결합할지를 상상하는 것은 즐겁다. 그렇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표현을 극대화해 나가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캔버스에서 물감을 섞어 보기도 하고 팔레트에서 색을 만들어 보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다양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두껍게 쌓아 올린 색들로 인하여 블랙홀처럼 혼란스러울 때에는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해야 한다. 그 관조의 시간으로 인해 틈이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미지가 소멸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작은 간극의 틈이 생성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림이 표현된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에너지의 울림을 찾아 간다.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휘날리는 꽃잎의 설정을 통해 단절된 캔버스 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감정의 저장고에서 테두리를 뚫고 나오는 꽃잎은 타자와의 대화이고, 순환하는 파동이다. 꽃잎의 파동은 시간을 넘고, 공간을 넘나드는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 영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청색계열의 색이 사용되었다. 청색은 경계의 색이며, 파장의 중간지대의 색이다. 만물의 생성을 의미하는 색으로 명상은 물론 신선함과 청결함을 상징한다.
청색은 삶의 에너지를 부여하는 근원을 상징하는 색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것을 도입한 색이 바로 청색계열의 색이다. 절제와 고요함, 그리고 자기와 다른 것들을 수용하는 균형으로의 가능성이다. 또한 이것은 실존하는 색이지만, 심리적인 색이며, 이승과 저승의 중간의 색으로 “극락정토”의 맑음 공간, 청량한 공간의 표현이다. 순수하고 무한 공간으로 텅빈 상태의 “사물의 무”를 나타내는 색이다.
코로나 블루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에서 누구나 이상향을 꿈꾼다. 그렇게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도 있고, 정선의 산수화에도 있다.
분명 우리 주위 어딘가에 그 이상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정선이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가 아픈 친구의 위로가 되기 위해 그렸듯이 나의 ‘바라봄’도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소통하며 누군가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경계에 선 사람들은 불안하다. 그러나 강하다. 극도로 예민해지고, 작은 흐름을 감지하며 고도의 불안감은 변화를 요구하며, 경계에 선 사람은 중첩의 비밀스러운 유혹의 시작이다. 이 유혹의 공간에서 경계란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며 혼돈 속에서 길을 찾아간다.
고요함에 깃들어 있는 움직임, 움직임 속에 깃들어 있는 고요함을 인식하는 것은 참다운 경지로 다가가는 길이다. 바로 “정중동”의 세계다. 현실과 비현실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에서 경계를 초월하고 생명의 에너지가 순환하는 공간으로 이동이며, 이상향의 세계처럼 꽃잎이 휘날리는 공간으로의 확장이다. 산의 울림이 퍼져서 역동적 파동이 넘치는 공간, 상상속의 청색 공간에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치유 공간으로 이동하기를 꿈꾸어 본다. 새로운 시작이다.
김흥숙의 조형세계
동서양 회화 양식의 절충식 미학
신항섭(미술평론가)
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유화는 재료가 전혀 다르다. 수묵화는 물을 이용하고 유화는 기름을 이용해 그린다. 수묵화와 유화가 서로 다른 것은 재료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물과 기름이라는 이질적인 재료의 차이만큼이나 표현된 이미지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그림의 표현양식을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을까.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형식이 나올 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서양의 회화 양식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작가들 사이에서 계속되어왔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김흥숙도 그 대열로 뛰어들었다. 그는 유화물감 대신에 아크릴물감을 사용해 산수화와 유사한 풍경을 그린다. 다시 말해 아크릴물감으로 수묵산수를 표현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얼핏 수묵이나 아크릴물감은 수용성이라는 점에서 일단 공통성이 있으니, 그럴 수 있으려니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의 작업에서는 수용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수묵화는 먹이라는 재료를 물로 용해해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반면에 아크릴화는 물감을 물과 혼합해 캔버스 위에 그린다. 수용성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한지와 캔버스는 소지 자체가 다르다. 수묵화는 검은색 물감을 중심으로 하여 담채를 곁들이는 정도이고, 아크릴화는 다양한 원색의 물감을 사용한다.
동서양의 서로 다른 회화 양식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장르의 붕괴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두 가지 표현양식의 장점을 취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조형세계, 즉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에 그렇다. 그는 아크릴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하면서 수묵산수화 기법을 원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수묵 대신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진 아크릴물감을 사용함으로써 수묵산수에 근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 따라서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연상케 하는 산의 모습도 눈에 띈다. 뾰족한 기암괴석들로 빼곡히 채워지는 <금강전도>처럼 조밀한 산봉우리들이 군집하는 형태의 산 그림이다. 하지만 산봉우리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뾰족한 바위들로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그 형태는 명확하지 않다. 형태가 선명하지 않아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특히 2020년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은 겸재의 <금강전도>와 흡사한 구도인데, 전면회화에 가깝다. 크기가 거의 일정한 바위 봉우리들이 밀집한 상태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풍경이 존재하지 않을 터이나, <금강전도>가 말해주듯이 수많은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금강산을 함축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구도이지 싶다.
물론 그의 경우에는 작품에 따라 바위 봉우리 사이사이로 공간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도의 작품이 존재한다. 어떻든 유사한 크기의 바위 봉우리들로 채워지는 작품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닌다. 바위 봉우리들이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는 장면에서는 장엄한 바위산의 힘찬 기세가 느껴질 정도이다. 그 기세는 어쩌면 산의 정령들이 발산하는 생명의 파동인지 모른다. 바꾸어 말해 뭇 생명을 품 안으로 거두어들여 내뿜는 대자연의 힘찬 맥박이다. 그의 조형적인 목표가 수묵산수화와 마찬가지로 기운생동이라면 그 실체에 근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작업은 소재에 따른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산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물 그림이다. 이 두 소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그림이 수묵산수화인데, 그 또한 수묵산수의 전형적인 구성 및 구도를 따른다. 산만을 소재로 한 경우에는 전면회화 방식의 구도와 더불어 마치 치고받을 듯 기세등등한 산봉우리가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도 있다. 어떤 형태 어떤 구도이든 산 모양이 다를 뿐 그 전체적인 인상은 다르지 않다. 산 대신에 수련으로 연상되는 물의 이미지가 중심인 작품도 있다. 물이 있는 그림에서는 바위가 물에 잠긴 채 섬처럼 서 있는 듯싶기도 하다. 이런 작품은 바위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수묵산수화의 구도를 빼닮았다.
이렇듯이 산과 물이 있는 작품은 그대로 수묵산수의 이미지가 오버랩한다. 다만 선묘 중심의 수묵산수와 달리 표현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의 작업은 표현행위 및 그 과정을 중시하는데, 표현행위 자체가 결과물에 이르는 요체인 까닭이다. 작업의 최종단계에서는 수묵산수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표현행위가 이어진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드러내겠다는 의지는 감춘 채,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미적 감흥에 심신을 맡긴다. 여기에서 무의식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기에 자율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며, 신체적인 반응 또한 여기에 호응한다.
이러한 표현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심상이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이듯 마음속에 어렴풋이 그려지는 상을 좇아가면서 작업한다. 심상을 따르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행위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상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그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감을 칠하고, 지우고, 또 덧칠하는가 하면 긁어내거나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거나, 흩뿌리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화면을 채워 나간다. 이러한 행위가 이어지면서 캔버스의 소지는 사라지고 물감의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 질감이 형성된다. 그 질감은 유화의 진득함이나 두터움과는 다를지언정 캔버스의 존재를 지울 만큼의 색층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화면은 구조적으로 한층 견고해지고 시각적인 심도가 깊어지면서 조형적인 사유의 창이 열리게 된다. 세상을 향해 열린 의식의 창이야말로 심미 세계로 가는 통로를 의미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하는 눈을 의미하는 심미적인 관점은 미의식의 심화와 공간적인 심도에 영향을 미친다. 의식 활동이 자유롭게 전개되는 사유의 공간에서는 사상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배양된다.
그가 다양한 기법으로 작업하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산수 그 이면에 자리하는 생명의 울림을 드러내려는데 있다. 그 울림은 모든 생물의 유기체적인 연결 및 연속성과 연관성이 있다. 모든 형태의 자연현상에는 보이지 않은 흐름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통해 생명의 기운이 생성한다. 이러한 자연현상을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녹여내려는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표현적인 이미지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표현행위에는 억지스러움이 없어야 한다. 즉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꾸밈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행위의 연속성을 통해 최종적으로 자연에 근사한 조형공간에 이르려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자연철학에 동조하는 일이다.
그의 작업은 전체적으로 단색조의 성향을 보인다. 청색을 기조로 하는 색채이미지는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짓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채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청색은 차가운 이성적인 색채이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색채이기도 하다. 청색 중심의 색채이미지는 수묵화와 마찬가지로 단색조의 효과를 나타내 시각적인 자극이나 즐거움이 없다. 반면에 의식의 집중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내면세계, 즉 의식의 흐름이나 감정을 침잠케 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청색을 기조로 하는 가운데 초록과 흰색 그리고 검은색이 부분적으로 드러날 따름이다. 이렇게 보면 수묵담채의 채색기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전체적인 색채이미지는 청색이 주도하는 상황인데 이로 인해 단색화의 금욕적인 정서가 지배한다. 단색조의 그림이 지어내는 정서는 시각적인 자극이 없는 대신에 내면으로 시선을 유도한다. 보이는 것 너머로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작품 속에 담긴 정서 및 내용으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업 가운데는 연분홍 색채가 주도하는 작품도 있다. 적은 숫자이지만 마치 봄날의 기운을 가득히 머금은 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여서 청색과는 사뭇 다른 서정적인 정서가 가득하다. 색채이미지로 인해 그림의 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와 같은 색채이미지의 연장일까. 그의 작업 가운데는 붉은 꽃잎이 산개해 있는 작품들이 있다. 산과 물 그리고 비구상에 가까운 이미지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난데없이 붉은 꽃잎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바람에 흩날리듯이 자리하는 꽃잎의 등장으로 인해 화면은 갑자기 밝아지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며 동적인 리듬이 발생한다. 꽃잎은 정지해 있는 공간의 침묵을 흔든다. 리듬을 타는 꽃잎의 존재 방식, 즉 바람에 흩날리는 상황은 의식 및 감정의 흐름을 반영한다. 어떤 동기에 의해 촉발된 꽃잎의 등장과 율동은 생동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만으로도 산수 경치의 음전한 존재감을 흔들어 깨우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 꽃잎의 존재를 따르다 보면 의식 및 감정의 흐름을 직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동서양 회화의 특징을 혼용하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작업한다. 어쩌면 동서양 회화의 절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서로 다른 회화 양식의 통합은 확실히 새로운 조형개념의 제안이라고 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개별적인 형식미에 대한 욕망이 필요한 시점이다.